우리는 날마다 영적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최전방의 사선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다.
나에게 날마다 들려오는 소리와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일들이 처참할 정도로 피투성이 되고
일그러진 강도 만난 자들의 형상들이다.
은혜의 사각지대에서 울부짖는 신음소리와
마귀와 문제의 쓰나미에 떠밀려 온
사람들의 처절한 애환들이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깊은 상처와
삶의 쪼들림과, 영적 갈급함과,
기도의 기갈과, 말씀의 허기짐과 내면의 쓴 뿌리와
가족 간의 불화와 억압된 감정을 품은 채,
그냥 삶에 순응하며 동화된 채로 자신을
겉치장으로 포장한 채 살아간다.
그런 심각하고 위험한 문제들에 대해서
자각증세도 없거니와 문제의식마저도 결핍된 듯하다.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거나 어디에 간들..
무슨 일을 한들.. '내 문제를 어찌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감과 패배주의를 품고 사는 듯하다.
게다가 이런저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처방을 내린 것이 전문병원을 찾지 않고
근처 구멍가게에서 파스를 사서 붙이거나
진통제로 참고 견디는 수준이 치료의 전부이다.
아니다.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
'반드시 낫는다'는 꿈 말이다.
행복한 삶을 향한 꿈, 풍성한 삶에 대한 꿈,
충만한 삶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애통해 하며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
어떻게 생명만 겨우 연명하는 삶을 살려하는가?
그 정도의 삶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는 것이다.
우리는 풍성하고, 충만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 값을 주님이 다 지불해 주셨기 때문이다.
환자가 병을 고침 받으려면 먼저 병원에 찾아가
전문의에게 진찰을 받고 필요하다면 검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처방과 진단을 얻을 수 있다.
중병일수록 스스로의 힘만으론 고침 받거나
회복될 가능성은 전무 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파도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병원을 찾는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회복을 위한 최소한도의 조건이다.
그리고 병의 증세에 따라 약을 쓰든지 수술을 하든지,
아니면 입원치료나 재활치료를 받아야 한다.
또 병원을 찾되 자신의 증세를 따라
전문병원의 전문의를 찾아야 한다.
내과에 가야될 환자가 정형외과를 가든지,
산부인과를 가야할 환자가 이비인후과를 찾으면 안 된다.
그래서 통찰력은 영 육간에 유익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문제(신앙문제)도 동일하다.
영적으로 갈급하여 진정한 회복과 치유와
충만을 원한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수고를 해야 하고 투자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든지,
기도원에 올라가든지 아니면 충만한 멘토를 만나든지
아니면 뜨거운 예배와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든지
신앙서적을 읽든지 은혜로운 설교를 구해서 듣든지
아니면 중보기도 팀에 알리든지 금식을 하든지
철야를 하든지 해서 하나님과 내가
일대일로 만나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회복과 충만과 치유를 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소유하는 것'이다.
아픈 환자가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듯이
영적인 환자도 천국병원으로 나아가 병원장 되시는
주님을 대면하여 치유를 위한 진단과 처방을 받아야 한다.
그냥 '이렇게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하지 마라.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어찌 심지 않고 거두려 하는가?
하나님의 사람들은 회복과 충만을 위해
무던히 몸부림친 사람들이다.
인간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며 영적인 문제는
나와 주님과의 문제이며 나와 주님과의 문제는
그분과 내가 만날 때 궁극적으로 해결되어 질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찾고 찾아야만 한다.
문제가 태산 같다면서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면
이적과 회복과 치유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하나님의 긍휼과 만날 때 일어나는 열매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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